18세기 예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고야의 작품은 그의 초상화를 통해 살아 숨 쉬는 표현과 뛰어난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작품에서는 고야의 친한 친구인 마르틴과의 독특한 우정과 예술적 교류, 그리고 사파터와의 의뢰에 대한 결단력이 엿보입니다. 고야의 초상화는 그의 예술적 진화와 함께, 동시에 그의 삶의 다양한 측면을 담아내어 풍부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야의 작품 기술적 진보와 감정의 깊은 전달
고야의 작품은 산출물이 줄어들었지만, 동시대 평론가들은 여전히 그의 초상화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고야는 주제의 표현, 화가의 살색 처리, 그리고 모델링 볼륨을 충실히 포착하는 데 있어서의 대가로 인정받았습니다. 묘사된 인물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생동감을 유지하여 관객에게 신선한 감동을 전달했습니다. 초상화 장르에서 고야는 세 가지 그룹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관계의 초상화, 친구들과의 초상화, 그리고 의뢰를 받은 초상화들. 특히 의뢰를 받은 초상화에서는 작가의 결단력과 명성을 정복하려는 의지가 드러났습니다. 명성의 동반자와 재산은 그의 성취와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고야의 작품은 훈련 단계의 진전을 반영하여 진화했습니다. 손의 편리함과 유동성이 증가함에 따라 작품은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숙달 및 수단의 경제성은 단순한 윤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림자와 빛의 사용은 개인적이고 본능적인 감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초상화의 본질은 재료와 페이스트 사용량의 변화에만 영향을 받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고야의 작품은 훌륭한 예술가로서의 기술적 특색뿐만 아니라, 작품 내에서 감정과 인간 본성에 대한 민감한 관찰을 통해 깊은 감동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관계의 초상화에서는 고야가 그림 속 인물들과 어떤 유대를 형성했는지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의 진정성과 예술적 발전은 그를 동시대 예술의 중요한 존재로 만들었으며, 그의 초상화는 오늘날까지도 예술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고야와 친구 마르틴 우정과 예술적 편지 증거
빌바오 미술관 소장품 중에서 '친구' 그룹에 속하는 '모라틴'은 고야의 가장 친한 친구로, 마르틴 자파테리 클라베리아입니다. 이를 확인하는 증거는 고야의 다수의 편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마르틴에 대한 편지들은 예술가의 성취, 가정생활, 직업적 발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며, 그와 사파테르의 경력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마르틴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는 "당신은 틀림없이 파드레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프란시스코 사파터를 이끈 호아킨의 학교"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르틴의 조카인 고야가 사파테르와 함께 에스쿠엘라스 피아스 학교의 책상에 올라가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고야의 초기 생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호세 루이스 오나는 고야의 가족에 대한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가난한 출신에서 시작하여 부유한 가문의 지원을 받고 예술가로 성장한 이야기는 그의 예술적 발전과 함께 그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이러한 복잡한 배경과 경험의 흔적을 담아내었고, 이는 그의 작품을 더욱 풍부하고 의미 있게 만들었습니다. 동경을 바탕으로 한 우정은 작은 게임, 투우, 음악과 같은 공통된 취향에 의해 크게 이루어졌습니다. 고야와 사파터는 서로에게 리자노라는 별명과 리자네로, 리자론의 변형들로 불리며, 이들은 칸토사 데사피오와 연결된 지역 민요 댄스인 요타스 데 피카딜로라에 대한 공동된 애정을 나눴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와 사파터의 예술적 교류
사파터는 고야의 조카이자 화가로서 남긴 그림과 판화들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이 중 일부는 고야의 서신과 처남의 편지에서 언급되었습니다. 마드리드로 떠난 고야의 후 고메스요는 고야의 큰 그림들을 사파터의 방에 장식품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1775년 2월 15일에는 Fray Manuel Bayeu라는 참고인이 사파터에게 편지를 써서 고야의 그림들 중 일부가 프레이 마누엘이 그린 사원 돔의 프레스코화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언급했습니다. 고야는 사파터에게 자신이 그린 스케치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이에 대한 편지에서는 스케치가 아마도 1778년 12월 7일에 고야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이 사파터의 방에 장식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고야는 몇 년에 걸쳐 계속해서 사파터에게 스케치를 제공했고, 1781년 8월 3일에는 스케치 중 하나를 사파터의 것으로 결정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를 통해 고야와 사파터 간의 예술적인 교류와 우정이 그림과 편지를 통해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야와 사파터의 동경과 우정은 공통된 취향과 예술적 교류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고, 그들의 작품과 서신을 통해 그 소중한 순간들이 전해졌습니다. 사파터의 소유물에 있는 단순한 스케치의 수는 그가 이 장르를 더 선호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종교적인 작품 외에도 고야는 카멜산의 처녀 등을 그리기도 했으며, 그들의 우정과 공통된 취향은 그림과 편지를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고야는 사파터를 위해 여러 차례 초상화를 그렸으며, 1789년 8월 5일의 편지에서는 "네 그림을 위해 캔버스를 준비한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위해 그것을 그릴 때까지 나는 평화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언급합니다. 빌바오 미술관에 소장된 프란시스코 사파테르의 수집품 중, 특히 고야의 초상화는 사라고사의 역사를 거쳐 파리의 폴 듀랑-루엘에게 팔리고, 최종적으로 라몬 데 라 소타이에게 인수되어 1980년 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이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소중한 미술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