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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독립과 콜럼버스의 대서양 탐험

by 자고 여행기 2023. 11. 16.

목차

    포르투갈은 독립 전쟁을 거쳐 디니즈 왕의 지배 아래 성공적으로 독립을 달성하고, 그의 통치 기간에는 학문, 상업, 해군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디니즈 왕과 후계자들은 카스티야와의 전쟁을 통해 독립을 유지하며, 1385년 알주바로타 전투에서의 승리로 확정되었고 이어서 헨리 왕자의 항해와 콜럼버스 이후의 탐험이 포르투갈을 대서양의 중요한 탐험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독립과 콜럼버스의 대서양 탐험

     

    포르투갈 독립 전쟁과 디니즈 왕의 놀라운 통치

    독립을 성공적으로 이룬 포르투갈은 자국의 북쪽 국경을 강화하며 카스티야에 맞섰습니다. 남쪽 국경은 무어인들의 희생으로 인해 더 남쪽으로 이동했고, 13세기 중반에는 알가르브가 정복되어 포르투갈의 경계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카스티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100년 이상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1279년부터 1325년까지, 포르투갈은 디니즈 왕의 지배 아래 놀라운 "시인왕"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디니즈는 시인뿐만 아니라 문학과 학문의 후원자로서 활동했으며, 1290년에는 리스본 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의 중심지를 코임브라에서 리스본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영국과의 상업조약 체결과 함께 농업과 대외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포르투갈 해군의 초석을 놓아 해상에서의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디니즈와 그의 후계자들은 카스티야와의 전쟁에 반복해서 참여했으며, 특히 1340년에는 포르투갈이 카스티야를 도와 살라도에서 무어인들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383년에는 페르디난드 왕의 딸과 결혼한 카스티야 왕이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에 반란을 일으켜 전왕의 사생아이자 수장인 존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이로 인해 카스티야와의 전쟁이 발발했고, 2년간의 전투 끝에 1385년 알주바로타 전투에서 카스티야의 결정적인 패배로 포르투갈의 독립이 확정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왕가와 해상 탐험

    존 왕은 아비즈 왕조를 세워 거의 200년에 걸쳐 포르투갈을 통치했습니다. 특히, 그녀의 큰 명성을 얻은 시기 중 하나는 1386년 알주바로타에서의 승리로 유명한 윈저 조약을 체결한 때입니다. 이 조약은 영국과의 공식적인 동맹을 이끌었고, 두 나라는 서로의 이익과 영토를 보호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동맹은 1387년에 존이 영국 랭커스터 가문의 딸 필리파와 결혼함으로써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필리파는 포르투갈 궁정의 문화에 많은 기여를 했고, 그들의 다섯 아들 중 하나인 헨리 왕자는 항해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헨리는 1394년에서 1460년까지의 생애 동안 항해와 탐험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식민지 시대의 선두에 서서 포르투갈을 바다의 강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지도 제작자, 천문학자, 바다의 선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1418년부터는 거의 매년 지리적 지식과 서아프리카, 극동의 탐험을 준비했습니다. 이러한 탐험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새로운 발견들을 이루었습니다. 마데이라는 1419년에, 아조레스에서는 1431년에, 그리고 세네갈에서는 1446년에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케이프 베르데 제도는 1455년에 탐험을 통해 발견되었고, 이러한 지역에서는 서양으로 금과 은이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탐험은 흑인 노예들의 끌어내기에도 이어졌습니다. 비록 헨리 왕자가 나중에 이를 금지시켰지만, 초기에는 이러한 인력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노예 습격이 이루어졌습니다.

     

    콜럼버스와 포르투갈의 탐험 새로운 대륙 발견

    콜럼버스는 1478년에 포르투갈에 정착한 후, 주로 포르투갈의 탐험 항해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서아시아를 서쪽으로 항해하여 도달한 경험이 있었고, 1480년대에는 포르투갈의 존 왕에게 자금을 받아 이를 기반으로 하는 원정대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이미 서아프리카를 향한 탐험에 투자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는 아프리카 루트를 거절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영국에 접근하는데 실패하고, 이에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의 후원을 받아 1492년에 스페인으로 향했습니다. 10주간의 항해 끝에, 그는 선원들의 오해를 이기고 산살바도르에 상륙했습니다. 처음에는 인도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이 오해는 계속되었고, 이를 포르투갈과의 갈등에 이용했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의 갈등은 교황의 개입으로 조정되었습니다. 교황은 스페인이 서인도 제도와 곶 베르데 제도 서쪽 100여 리를 소유하게 허용하면서 두 나라 간의 토르데시야 조약이 탄생했습니다. 이로써 북미에서의 충돌을 피하고,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획득하며 공식적으로 이 지역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콜럼버스 이후에는 다양한 항해가 있었는데, 베스푸치와 마젤란 등의 여행자들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피렌체 출신인 베스푸치는 포르투갈에 봉사하며 미국 동부 해안을 탐험했고, 그의 이름이 새로 발견된 대륙에 부여되었습니다. 마젤란은 브라질을 항해한 후 리오 데 라 플라타 하구를 탐험하고, 남아메리카 남단을 지나 태평양과 동인도 제도까지 항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