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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반도의 역사 무어인과 기독교 왕국

by 자고 여행기 2023. 11. 14.

목차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과 기독교 왕국 간의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무어인은 반도를 정복하고 남방으로 진출하며 프랑스와의 전투 등 다양한 시도를 했으며 동시에 북부 기독교 왕국들은 독립과 무어인에 대한 항전을 펼쳤습니다. 전쟁, 동맹, 문화 교류 등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이 지역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겠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 무어인과 기독교 왕국

     

    8세기에서 11세기까지의 무어인

    무어인은 반도를 정복한 후(아스투리아스 제외), 무어인은 남방으로 진출했습니다. 프랑스를 침공하려 했지만 732년 투어스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에 패배했습니다. 그 후 철수했고, 45년 후에는 프랑크인 황제 샤를마뉴와의 전투에서 53명의 싸웠습니다. 이것은 서유럽 전역에서의 기독교 확대를 위한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스페인 침공에서는 영웅적인 방어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고사에서 되돌아갔습니다. 롤란드 아래에 있던 그의 후위는 피레네 산맥의 론세발 고개에서 전멸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샹송 드 롤란드'와 같은 낭만적인 노래로 불멸화되었습니다. 세기말에는 샤를마뉴가 돌아와 801년에 바르셀로나를 점령하고 '스페인인'으로서 프랑스 국경에서 남쪽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지역을 조직화했습니다. 스페인 행진곡과 북서쪽 기독교 요새를 제외하고 무어는 11세기 후반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지배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무어인은 오마이야드 왕조가 통치하고 수도는 코르도바에 있었던 안달루시아를 중심으로 했습니다. 무어인들은 비시고딕, 세르티베리안, 히스파노로마 피실험자들을 치료하고 기독교인들은 무어 정부의 고위직으로 승진하여 혼혈 결혼이 자주 있었습니다. 농업에서 무어인들은 새로운 작물을 도입하고 아랍 기술자에 의해 농업이 확장되었습니다. 예술, 과학, 문학에서는 르네상스를 가져와 몇 세기 동안 유럽이 가상 지적으로 정체되었을 때, 아랍 세계는 서양을 선도하고 아랍어 번역을 통해 고대 지식을 전파했습니다. 코르도바는 주요 지적 중심지가 되어 400,000권의 도서관과 의학, 수학, 철학 등에서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이 있었습니다.

     

    스페인 북부 기독교 왕국의 무어인 항전과 독립 시도

    4~5세기 초기의 북쪽 기독교 왕국은 다양한 동향을 겪었습니다. 무어인의 점령은 주로 전쟁과 음모에 기인하며, 무어인을 몰아내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습니다. 특히 기독교 국가 간 무슬림 동맹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11세기에는 레콩키스타가 발전하지 못하였고, 아스투리아스의 기독교 왕국은 펠라요가에 의해 세워졌으며, 10세기 초에는 오비에도에서 레온으로 수도를 이전하며 선도적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기 중반에는 레온과 적대적인 카스티야의 백작령이 독립하였습니다. 동시에 북동부 스페인 주민들은 바르셀로나의 지도자들과 카롤링거 통치자들에게 독립을 시도했습니다. 9세기에는 샤를마뉴가 등장하며 10세기에는 피레네 산맥의 바스크 왕국 나바라가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11세기에 나바라는 분열되어 산초 대왕의 죽음 이후 나바라와 아라곤으로 나뉘었고, 카스티야의 페르디난도 1세에 의해 카스티야가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페르디난도는 무어인들로부터 포르투갈 북부 지역을 되찾았고,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의 톨레도 정복으로 레콩키스타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어서 11세기에는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사라고사를 점령하여 무어인들을 격퇴했습니다. 톨레도를 잃은 후 무어인들은 베르베르 왕조의 도움을 받아 알모라비드의 지배하에 카스티야를 패배시키고 많은 지역을 되찾았습니다. 1139년에는 아폰소 헨리크의 캠페인으로 리스본을 포함한 여러 요새를 점령하며 무어인들을 몰아냈습니다. 그러나 나바라의 독립과 바르셀로나와의 연합에서 추가적인 진전은 중단되고 후퇴했습니다.

     

    아프리카로부터의 도착과 알모하데스인의 도전

    2세기 후반에 아프리카로부터의 도착은 알모하데스인에 의한 베르베르 침략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알모라비다보다 더 격렬하고 불관용적인 이슬람교도였으며, 무어 스페인을 정복하고 1195년에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의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교황의 촉구로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는 알모하데스에 대항하여 연합군을 조직하였고, 1212년 톨로사 전투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50년 동안, 페르디난드 카스티야 3세와 아라곤의 제임스 1세는 승리를 이어갔습니다. 페르디난드는 코르도바, 세비야, 카디스 등을 정복하였고, 제임스는 발렌시아와 발레아레스 제도를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중반 이후에는 전체 반도가 남부의 그라나다를 제외하고는 기독교인들의 손에 들어갔으나, 협력은 감소했습니다. 아라곤은 지중해 제국 건설에 에너지를 투여하고, 카스티야는 내부 분쟁과 정치적, 경제적 붕괴를 경험했습니다. 무어인들은 그라나다를 1340년에 정복하기 전에 약 2세기 동안 통치했으며, 1492년에 이사벨라의 통합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연합되었습니다. 그러나 14세기와 15세기에는 귀족과 성직자의 권력 억제, 내전, 종교재판소 설립, 유대인 추방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에 아라곤은 이탈리아 일에 주력하며 지중해 지역에서 강력한 지위를 차지하였고, 1512년에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연합하여 스페인의 현재 국경을 확정했습니다. 나바라는 나바라의 헨리 3세가 프랑스에 편입되면서 북쪽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