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기의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침공과 독립전쟁으로 혼란에 빠져 프랑스 통제를 벗어난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했습니다. 1810년의 카디스 코르테스를 통한 헌법 제정 시도, 1812년의 새 헌법 제정, 그리고 왕의 복귀로 인한 독립운동은 지역 간 정치적 갈등과 자유주의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어 1898년의 스페인-미국 전쟁과 정치적 재편은 국가를 혼란과 변화의 과정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스페인 독립전쟁의 혼란과 정치적 전환
독립전쟁 초기부터 프랑스의 통제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다양한 준타들이 나타났습니다. 군대 지휘관이나 게릴라 지도자, 혹은 지역 시민단체가 프랑스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 지하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주로 프랑스군과의 전투로 이어졌습니다. 종종 군대, 당파, 민간단체 간에는 종군에 대한 통제 권한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특히 카디스에서는 중앙 군사정권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카디스는 부재중인 왕실을 대신하는 입법 기관으로서 1810년에 지역 종군의 대표를 소집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때 이미 해외의 많은 지방들이 독립을 선언한 상황이었고, 일부는 카디스의 코르테스를 임시 정부로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없는 상태에서 의회가 입법을 할 수 있다는 개념은 많은 정통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카디스의 코르테스 대표단은 주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두 주류로 구성되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받아들이고 법 앞에서 평등을 추구했습니다. 새 헌법은 자유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1812년에 제정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라틴 국가들의 자유주의 헌법의 모델로 사용되었습니다. 새 헌법은 부패한 왕정의 방지를 목적으로 하였고, 제한된 군주제를 도입하여 의회의 통제를 받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참정권은 재산 자격에 따라 결정되었고, 상업계급의 지위가 중요시되었습니다. 또한 헌법은 지방 자치 체제를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행정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구축하였습니다. 1812년 헌법은 스페인의 자유주의 전통의 시작을 나타내었지만, 페르디난드 7세가 1814년에 왕위에 복귀하면서 그는 새 헌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스페인 미국 식민지들은 혼란을 이용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대부분은 새로운 공화정 정부를 선포했습니다. 그 결과 1825년까지 오직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만이 스페인 통치 하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독립운동은 미국 전쟁에 참여한 자유주의 장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습니다. 섭정은 제1차 칼리스트 전쟁 동안 군대 내의 자유주의적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지만, 전쟁이 종료된 후에는 자유주의자들과 군대가 모두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지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1840년에 그녀는 사임하게 되었고, 자유주의 정부가 섭정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정치의 역동 자유주의자들과 국가 분열
자유주의자들은 주로 편협한 엘리트였습니다. 그들의 추상적인 이상주의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관심은 스페인 농촌 사회의 온정주의적 태도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스페인에는 자유주의 운동이 없었지만, 반관용주의자들이 모여 자유주의의 시금석을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개인의 합으로 여기고, 국가는 개인의 권리뿐만 아니라 교회나 지역의 관습과 이익을 보호하는 것으로 이론화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성문헌법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의회제 정부와 중앙집권적 행정, 자유방임적인 경제학의 필요성에 동의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목소리를 내고 이들 자유주의자들이 리더십을 이끌어냈으며, 그들은 이 지원을 통해 군대 내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유주의 원칙을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온건파는 자유시장에서 경제발전을 보고 정치 혁명의 치료법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보장된 자유를 갖춘 강력한 헌법을 주장했고, 주로 상층부와 하층부의 일원으로서 중산층과 도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이들은 경제 발전과 그 결과물의 공평한 분배를 보장하기 위해 더 많은 참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칼리스트 봉기 이후 군대는 이사벨라의 후계자 지지자들과 연합하여 온건파를 지지하였고, 정치 지도자들은 정기적으로 투표를 실시하여 정부 후보자를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와의 국가적 관계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분열을 야기하는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정부는 지방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히 빨리 지방 분권을 실현하지 못해 급진주의자들의 불만을 증폭시켰습니다. 이들은 나라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잃은 마드리드에 대한 반발로 자치권을 선언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군대는 "국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나섰습니다. 이로써 단일 공화국 형태의 국가 정부는 임시 군사 독재 정권의 투명한 위장 역할을 일시적으로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정치의 전환과 전쟁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능력자 알폰소 십이 세, 이사벨라의 아들로 불리며 부르봉 왕정을 회복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스페인, 가톨릭, 자유주의"로 선언한 알폰소는 군대와의 좋은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영국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스페인으로 소환되어 안정된 민간 정부에 만족하며 정치에서는 자신을 제거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공식적인 지위가 헌법적으로 확인된다는 주장을 펼치며 보수적인 왕정 회복을 지지했습니다. 이에 따라 새 정부는 의회에서 양당 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선거 조작을 사용했으나, 결과는 모방에 가까웠습니다. 알폰소 십삼 세는 알폰소 십이 세의 후계자로 나아가 스페인에 조용한 세대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1931년에 퇴위하면서 현지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은 감소했습니다. 미국이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한 뒤, 쿠바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미국과 스페인 간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미국은 고대 스페인 해군 부대들을 파괴하고 산티아고 데 쿠바와 마닐라 만을 점령했습니다. 스페인은 파리에서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을 포기하며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들과 그에 대한 무능한 정부의 처리는 정치적인 재평가를 유발했습니다. 좌파와 우파는 두 정당 체제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고 의회 구조를 혼란에 빠뜨린 새로운 정당과 지역 단체들이 등장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1915년까지 의회 과반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보수주의자인 안토니오 마우라 등 일부 우파 정치인들은 전통적인 권위주의 회귀를 주장하며 의회 정권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마우라의 국가적인 가톨릭 정당 창당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의 정치 철학은 우익 단체들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지역주의 운동은 카탈루냐, 바스크 지역, 갈리시아 등에서 발생하여 "카스티야 시체"에서 해방을 목표로 조직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성격과 역사를 강조했습니다. 카탈루냐의 정당들은 정기적으로 의회 파견단을 마드리드로 보내 카탈루냐 지역주의에 대한 양보를 모색했습니다. Alejandro Lerroux는 자유주의 성향의 소수파를 반왕정주의 진영에 끌어들인 조직자로, 국민을 기반으로 한 급진 공화주의자들을 결성했습니다. 또한 중산층과의 동맹을 맺으며 카탈루냐 인들과 연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