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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중세 정치와 정복, 종교 갈등 연합국가

by 자고 여행기 2023. 12. 19.

목차

    중세 시대의 스페인에 대한 정복, 정치, 종교, 지방 다양성 등의 주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8세기 초에 시작된 무슬림의 침략부터 15세기 후반의 귀족 간의 정치적 혼란까지,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은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 글은 주로 이슬람 정복, 알 안달루스의 형성, 그리고 중세 스페인의 다양한 국가와 지역 간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스페인 중세 정치와 정복, 종교 갈등 연합국가

     

    안달루시아 비시고트족 침략부터 종교 갈등

    8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나온 군대가 스페인의 비시고트족 방어선을 침략하면서 무어인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군대는 주로 북아프리카 출신인 아랍인과 모로코의 베르베르인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711년, 베르베르 총독 타리크 이븐 지야드는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으로 진격하여 로데릭 왕에 대항하는 비시고트족 반란을 지원했습니다. 로데릭은 전투에서 패하고, 이후 모로코로 돌아간 타리크를 712년에 무사 이븐 누사이르가 이어받아 스페인으로 침입했습니다. 무사 이븐 누사이르는 단 둘이면서도 강력한 아랍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정복했습니다.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그는 프랑스로의 진격을 시작하여 3년 동안 극북의 산악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정복했습니다. 이로써 이슬람 스페인, 알 안달루스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알 안달루스는 다마스쿠스의 시민 종교 지도자에 의해 조직된 이슬람 국가로, 정치적으로는 시리아에서 출신 한 아랍인들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스페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집단은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인이었으며, 이들은 종교적 열정과 근본주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스페인에서는 베르베르 정착민들이 전국으로 퍼져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비시고트족 귀족 중 대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새로운 사회에서 특권적 지위를 유지했고, 도시에는 히스패닉-로마 기독교 공동체가 살아남았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상업, 학문, 전문직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압바스 왕조에 의해 756년에 다마스쿠스에서 칼리프가 전복되면서 알 안달루스는 독립된 정치적, 종교적 주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알 안달루스는 여러 정치적 격변을 경험하며 지배 영역이 분열되었습니다. 976년에 히샴 2세가 왕위를 물려받은 후, 알 만수르(알 만수르)는 사실상의 독재자로 등장하여 종교적 통합을 강조하고 성전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독재 정권은 지배 계급과 지역 귀족, 군 사령관들의 저항에 부딪혀 분열을 빚었습니다. 알 만수르의 독재에 대한 반발로 타파(독립된 도시 국가)들이 성립되었고, 스페인의 지도는 혼란 속에 빠졌습니다. 이때부터는 기독교 국가와의 갈등이 심화되며, 종교 간 갈등과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습니다. 모자라브 수도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교회는 알 안달루스에 대한 도전을 이끌었고, 북쪽에서는 베르베르인과 유대인의 압력이 가중되었습니다. 11세기에는 기독교 국가의 위협이 커져 알 안달루스의 안보가 심각한 위험에 직면했습니다. 모자랍인들은 청교도 베르베르인과 유대인의 압력에 의해 분열되었고, 모자랍 수도회는 종교적 억압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모자라브는 종교와 납세 책임을 제외하고는 일반 이슬람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기독교 공동체에는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와 함께 9세기에는 코르도바의 모자라브 수도회에서 오히려 기독교를 비난하며 순교를 촉구하는 사례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긍정적인 교류도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다양한 종교적 집단이 공존하면서 어느 한 집단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지 못하는 다양성의 특징을 보여주었습니다.

     

    중세 스페인 정복과 연합국가 형성

    8세기 무슬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은 주로 옛 수에비아 왕국의 아스투리아스 산맥 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지역은 스페인에서 가장 로마화 되지 않고 기독교화가 적게 이뤄진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오비에도의 왕 펠라요는 주변 원주민들을 규합하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정복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중세 스페인 역사에서 700년에 걸친 정복의 시작이었으며, 무슬림에 대한 항전과 함께 제국의 재건과 스페인의 통합이 임무가 되었습니다. 아스투리아스에서 시작된 정복은 무슬림을 제거하고 제국의 재건을 위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계속되었습니다. 펠라요는 무슬림에 대항하기 위해 인구 감소와 요새화를 실시하고, 국경이 전진함에 따라 재건된 지역에 다시 정착했습니다. 국가의 정치적 중심은 군사적 방향으로 이동하며 10세기에는 레온 왕국을 위한 완충지대로 요새가 건설되었습니다. 카스티야 지역은 이 시기에 성장하며, "성의 땅"이라 불리면서 독자적인 방언, 가치관, 관습을 형성했습니다. 국경 전사와 자유 농민 등이 카스티야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을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981년에는 카스티야가 독립된 카운티가 되었고, 1004년에는 왕국으로 발전했습니다. 카스티야와 레온은 주기적인 왕실 결혼을 통해 연합되었지만, 1230년에 페르디난드 2세에 의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피레네 산맥을 따라 형성된 포켓 장벽과 카탈루냐 지역은 프랑크족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 스페인에 대항하며 국경을 지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라곤 왕국과 카탈루냐 카운티는 1100년에 결합되었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카탈로니아와 발레아레스 제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1137년에는 라몬 베렌게르 4세의 결혼을 통해 아라곤과 카탈루냐가 연합되었고, 이로써 이 지역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따라서 베렝게르와 그의 후계자들은 서로 다른 고유한 정부, 법규, 통화, 정치적 성향을 가진 두 개의 왕국을 통치했습니다. 이들 각각의 특징은 뚜렷하게 드러났으며, 통화 및 정치적 성향에서도 차이를 보였습니다. 무슬림 아미르에게 점령당한 발렌시아는 1238년에 아라곤 및 카탈루냐와 연방을 맺었습니다. 세 왕국의 연합으로 인해 아라곤은 주로 "연방"이라는 용어로 설명되며, 이는 베니스와 제노아와의 경쟁에서 지중해 무역을 주도했습니다. 아라곤의 상업적 영향력은 흑해까지 확장되었으며,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는 특히 직물 무역으로 번창했으며 마약, 향신료, 노예 거래로도 번영했습니다.

     

    스페인의 중세 정치와 지방 다양성

    11세기에는 타이파로 인해 아라곤의 일부가 분열되었고, 이로 인해 카스티야 족에게 일시적으로 약화되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1085년에 톨레도를 잃은 놀란 다미르 족은 알모라비드에게 원조를 요청하여 톨레도를 다시 차지했습니다. 알모라비드는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제국을 통합하며 종교적 부흥을 시도했으나, 스페인에서는 선교 활동이 빠르게 둔화되었습니다. 알모라비드 국가는 12세기 중반에 알모하드에게 퇴직되고, 알모하드는 스페인에 수도를 세우고 세비야를 수도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212년)에서 알모하드의 확장이 막혀, 이후 스페인은 다시 무슬림의 강세를 보게 되었습니다. 페르디난드 3세는 1248년 세비야를 점령하며 그라나다를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한편, 아라곤은 13세기에 발렌시아를 합병하면서 지중해 지역에서의 영토적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카탈루냐는 외교적으로 더욱 활발했으며, 피터 3세는 1285년에 시칠리아 왕으로 선출되어 이탈리아 정치에 개입하였습니다. 카스티야는 대서양에서의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으며, 특히 한자동맹과의 무역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경제 구조와 사회적 태도로 인해 지속적인 경제 발전은 어려웠습니다. 경제 구조의 제약으로 양모 생산을 통제하는 메스타가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상업 활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점도 발전을 제약했습니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상업은 귀족들에게 낮은 지위로 여겨졌고, 토지 소유가 높은 지위와 명성을 얻는 주요 수단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소귀족을 꿈꾸며 성공한 부르주아 기업가들은 주로 토지에 투자했습니다. 토지 소유가 사회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다른 경제 부문보다도 토지에 투자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경제의 다양성과 성장을 억제하며 정체 상태를 초래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도입된 봉건제는 귀족을 왕에게, 세입자를 지주에게 예속시키는 제도였습니다. 봉건제는 계층 간의 명확한 사회 구조를 형성하였고, 이로 인해 계급 간의 긴장이 증폭되었습니다. 반면에 카스티야는 경쟁이 적고 응집력이 강하며 평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카스티야의 왕들은 정치적 중앙집권주의를 강조했지만, 지방 영주들을 희생시키는 식으로 단일 국가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라곤-카탈로니아는 연방 원칙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왕실과 귀족 간의 봉건적 합의가 부족한 카스티야와 대조적으로 조화롭게 발전했습니다. 스페인의 다양한 지역은 지역 간의 갈등과 더불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차이를 보였습니다. 특히 카탈루냐는 다른 지역과의 차이를 뚜렷하게 나타냈고, 아라곤과 카탈로니아는 정치적인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는 트라스타마라 가문이 등장하여 카스티야를 획득하며 새로운 귀족 계급을 창출했습니다. 이로 인해 왕이 약화되면서 귀족들은 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게 되었고, 카스티야에서는 사회적 혼란과 제도의 붕괴가 나타났습니다. 아라곤 역시 1416년에 트라스타마라스 가문의 다른 지파가 왕위를 계승하며 혼란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