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미국 대륙의 식민지를 개척하고,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정복으로 중남미를 통치했습니다. 브라질의 초기 식민화 시도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후에 브라질에서의 정착화 정책이 활발해졌습니다. 찰스 1세와 이어진 국왕들은 유럽 역사에서 종교개혁과 네덜란드 반란과 같은 어려움에 직면하며 역사적 전환점을 경험했습니다.
스페인의 탐험과 식민지 정복
위대한 항해에 이어 스페인은 식민지 개척에 앞장섰습니다. 미국의 첫 번째 정착지는 서인도 제도의 산토도밍고에 있었고, 1496년에는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 후, 그의 형 바르톨로뮤에 의해 이어졌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스페인 사람들은 서인도 제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파나마는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합니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받는 업적은 코르테스의 멕시코 정복과 피사로의 페루 정복입니다. 1518년, Hernando Cortes는 쿠바에서 600명의 남자, 17마리의 말, 10개의 총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그는 고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고 멕시코 중부를 정복했으며, 부관들은 그 후 20년 동안 멕시코 남부, 과테말라, 온두라스, 그리고 마야 제국의 유카탄 반도를 정복했습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파나마에서 살기 위해 바다로 끌려간 문맹의 재단사로, 페루의 엄청난 부에 대한 소문을 듣고 1531년 페루로 항해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주로 금에 대한 욕망이었으며, 그는 배반과 살인을 통해 잉카 제국을 무너뜨렸고 1536년에는 페루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정복은 현재의 토착 치브차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콜롬비아의 케사다와 아르헨티나의 메도사에서 정착지를 세웠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미국 서부 연합의 대부분을 탐험했으며, 1565년에 플로리다에서 실패한 뒤 프랑스인을 쫓아내어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최초의 영구적인 정착지를 세웠습니다.
스페인의 뉴월드 정복과 브라질의 식민화
페루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볼리비아 고원으로 내륙으로 진출했고, 남쪽으로 진출해 칠레까지 이어졌습니다. 16세기말까지는 뉴멕시코와 플로리다를 포함한 영토 전체가 북쪽에서 칠레와 남쪽의 리오 데 라 플라타(브라질 제외)까지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정복의 배경에는 스페인 왕관이 위대한 가톨릭 신자의 비전에 영감을 받아 제국을 성장시키는 것이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나온 금, 은, 그리고 귀중한 돌들의 발견으로 경제적 부흥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초기 정복은 주로 왕의 대가 없이 이루어져 왔으며, 코르테스나 피사로와 같은 "정복자" 모험가들이 개인적으로 희생을 기울여 탐험대를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권위와 영토의 부를 공유하는 형태의 보상을 얻었습니다. 한편, 동양에 대한 포르투갈의 관심은 처음에는 브라질의 식민지화 시도에 큰 효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520년대에 프랑스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브라질을 보호하고자 더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게 되었고, 1530년에는 마르틴 데 수자가 식민지 원정대를 지도하는 데에 보내졌습니다. 그 결과, 브라질은 중앙집권적인 행정이 강화된 19세기 초에는 총독부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바이아가 수도로 세워지고, 리오 데 야니에로도 세워지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는 총독부의 권한이 페르난부코에서 리우데자네이루까지 해안가를 넘어 확장되지 못했습니다.
스페인 국왕 찰스 1세와 유럽 역사의 전환점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은 1504년에 사망하였고, 그 후 왕위는 딸과 손자인 찰스 1세에게 넘어갔습니다. 찰스는 스페인과 미국 식민지를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로부터 상속받았으며 이어 이탈리아 남부 지역도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151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을 그의 제국으로 지정하였고, 태생적으로 플레밍족인 찰스는 19세에 통치자로 증명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많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적대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합스부르크와 스페인의 배경을 가지고 신교도들에게 강력하게 대응했습니다. 스페인은 찰스의 권력 중심지가 되었지만, 그의 부재와 재산 분배로 인해 스페인 계승 미국인들과의 불만이 일어났습니다. 1555년에 찰스는 퇴위하고 수도원에 살았으며, 그의 형 페르디난트와 아들 필립이 그의 뒤를 이었습니다. 필립 2세는 가톨릭 신자로서 근면하고 진지한 통치자로 인정받았지만, 스페인은 그의 통치 중에도 일정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교황과의 동맹을 맺으며 스페인을 유럽에서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지만, 해상에서의 약점과 무역을 통해 부를 최대한 활용하지 못한 점이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상황은 필립이 네덜란드를 주요 수입원으로 삼아 번영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종교재판, 군대 축소, 그리고 도시 특권의 상실은 네덜란드에서 반란을 촉발시켰습니다. 1567년에 필립은 알바 공작을 파견하여 북부 이단자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한 파르마 공작은 스페인에서 새로운 군대와 함께 보내졌습니다. 그 결과, 파르마 공작은 젬블룩스에서의 압승을 통해 1578년에 브뤼셀을 수복하였고, 남쪽 지방은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북쪽 네덜란드는 바다를 지배함으로써 자신들의 대의를 유지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영국과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고, 필립은 1588년에 네덜란드를 침공하려고 결정했지만, 영국 함대의 저항으로 실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