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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치적 갈등과 문학 유산

by 자고 여행기 2023. 11. 18.

목차

    16세기 초 포르투갈은 번영했지만 권력 약화와 스페인 영향으로 위기에 처했습니다. 가톨릭 정책으로 불안 증가, 종교 내전과 실패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관계가 복잡해졌고, 1640년의 카탈루냐 반란으로 무혈 쿠데타로 독립을 성취하게 됐습니다. 정치적 갈등과 함께 이뤄진 문학의 황금기와 어울림으로 두 나라 간의 상처와 문학적 유산을 탐구합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치적 갈등과 문학 유산

     

    스페인의 영향과 침공

    16세기 초에 영광의 절정에 이르렀던 포르투갈은 마누엘 1세 치세 이후 권력과 영향력이 감소했습니다. 마누엘은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에 기여한 반면, 포르투갈의 번영은 그의 아들 요한 3세의 치세에 가톨릭교의 영향을 받아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1536년에는 예수회가 초대되었고, 이 단체는 교황의 승인을 받아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이교 탄압, 세계적인 선교, 그리고 성직자 부패 및 무지의 박멸이었으며, 이를 위해 훈육이 철저한 학교들이 설립되었습니다. 이 노력은 정치적 권력 획득을 향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포르투갈의 요한 3세가 세바스찬의 손자로서 죽음을 맞이하자, 세바스찬이 고향으로 돌아와 왕좌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세바스찬은 현재 정부를 통제하는 예수회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무어인들과의 전투를 시작하며 십자군 전쟁을 벌였지만, 1578년에 알카자르-키비르 전투에서 포르투갈 군대는 패하고 세바스찬은 사망하였습니다. 이로써 포르투갈 귀족들은 시들었고, 세바스찬의 증조부 헨리에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2년 후에 사망하면서 아비즈 왕가는 사라졌습니다. 포르투갈에서는 여러 왕위 후계자들이 주장을 펼치게 되었고, 그 가운데에서 스페인의 필립이 예수회의 지원을 받아 제일 강력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스페인 군대는 알바 공작의 지배하에 포르투갈을 침공하였고, 알칸타라 전투에서의 승리를 거두며 1580년에 필립이 포르투갈의 왕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후 60년에 걸쳐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그녀의 이익은 스페인의 이익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스페인 종교적 내전과 전략적 실패로 인한 위기와 복수

    스페인의 역사는 포르투갈과의 연합으로 인해 일시적인 힘을 얻었지만, 여전히 네덜란드와 아르마다의 문제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재정 문제와 농업의 쇠퇴는 그녀를 힘들게 했고, 평화와 긴축의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법정의 음모와 부패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여전히 유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1589년부터 1598년까지 가톨릭 측에 개입하여 실패로 끝나는 종교적 내전에 직면했습니다. 프랑스의 앙리의 승리로 인해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필립 2세의 사망 이후, 필립 3세와 필립 4세는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필립 3세는 은퇴하고, 필립 4세는 올리바레즈 백작 부인에게 권한을 넘겼습니다. 그러나 올리바레즈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스페인의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올리바레즈의 전쟁 정책은 오히려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1639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함대는 네덜란드에 의해 다운스 전투에서 격파되었고, 네덜란드의 독립은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11년간 계속되었고, 영국은 프랑스 편에 합류하여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스페인에 더 큰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1640년에는 세금 정책과 권력 집중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고, 카탈루냐에서는 독립을 선언하는 반란이 발생했습니다. 이 반란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12년 후에 바르셀로나가 항복하며 종결되었습니다. 피레네 조약에 따라 카탈루냐는 과거의 특권 중 일부를 되찾았지만, 스페인은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복잡한 역사

    1640년 카탈루냐 반란에서 영감을 받아, 포르투갈 애국자들이 코임브라 대학의 리베이로 교수님의 지지를 받아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존 4세 공작으로 즉위했습니다. 이들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인 브라간자였고, 당시에는 스페인이 이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카탈루냐의 반란과 마찬가지로, 브라간자는 투쟁 없이 포르투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두 나라 간의 관계는 28년 동안 계속되었고, 마침내 1668년에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포르투갈은 몰루카족, 말라카족, 실론족을 네덜란드군에게 빼앗기며 일부 소유지를 상실했습니다. 또한 포르투갈 남아메리카에서는 네덜란드인들이 1623년에 페르남부코를 점령하고, 1640년에는 스페인-포르투갈 함대를 물리치고 브라질로 진격하는 등의 손실을 겪었습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1668년의 피레네족 조약을 통해 스페인이 마침내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했으며, 이로써 두 나라 간의 갈등은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관계에 길이 남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두 나라의 정치력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동안은 스페인 예술과 문학의 황금기였습니다. 엘 그레코, Ribero, Velasquez, 무리요 등의 화가들과 세르반테스, 성 요한, 로페 데 베가, 칼데론 등의 작가들이 이 시기에 명성을 얻었습니다. 포르투갈 또한 이 기간 동안 위대한 시대를 쓴 시인 카몽즈를 비롯한 작가들이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의 황금기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치적인 변화와 함께 끝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이 1640년에 독립을 선언한 해에 카몽즈는 그의 마지막 말로 "나는 조국과 동시에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전한 바 있습니다.